4.19 혁명 이란 ? 그리고 4.19 혁명이 일어나게 된 역사적 배경 5가지 정리

4.19 혁명을 그다지 잘 알지 못하는 세대 입니다. 이번 건국전쟁이라는 영화가 사회적 잇슈가 돼 ( 저는 보지 않았지만 )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가 이루어 졌니 ~ 기타등등… 그래서 사실 4.19 혁명에 대한 내용들을 검색하게 됐습니다. 단순히 독재에 맞서 국민들이 들고 일어난 (?) 혁명이다 (성공햇으니) 정도만 알고있었는데 그게 아닙니다. 4.19 혁명은 대한민국이라는 우리나라 성장 발전의 원동력 이었고 높은 국민의식과 민주주의를 열망하고 갈망하는 역사적 전화점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4.19 혁명이 일어날수 밖에 없었던 그 역사적 배경도 한번 정리 해 봅니다

4.19 혁명

  1. 4.19혁명은 1960년 4월 대한민국에서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항거해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서 대한민국 제1공화국을 끝낸 민주주의 시민 혁명이다.
  2. 국제적으로는 아시아에서 드물게 성공한 민주 혁명으로 평가된다.
  3. 2.28 학생민주의거와 3.15 부정선거로 인한 시위가 4.19 혁명의 서막으로서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3.15 부정선거에 시민들이 항거하여 대대적으로 일어난 이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4.19혁명 배경

  1. 6.25 전쟁이 휴전 협정으로 일시적으로 총성이 멎은 지 불과 7년밖에 지나지 않았던 1960년에는 이미 국민들 사이에 민주주의를 향한 강렬한 열망이 들끓고 있었다.
  2. 6.25 전쟁의 후유증으로 인해 나라 전체가 가난에 허덕이던 시절에, 더더욱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민주시위가 가능했다
    • 언론의 영향력
      • 1950년대 당시 언론인들은 최대의 지식인 계층에 속했다.
      • 친정부적 성격을 띤 신문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논조는 이승만 정부에 매우 비판적이었으며 사회 참여적인 성격이 몹시 강했다.
      • 각 언론사들의 주필들은 다양한 논설, 사설, 칼럼을 통해 민주적 가치를 독자들에게 지속적으로 환기하였다.
      • 이승만은 초기의 언론 자유에 대한 신념을 버리고 탄압 정책으로 전환했다.
    • 높은 교육 수준
      • 오늘날의 교육 수준에 비교할 수 없지만 당시의 교육열은 붐에 가까웠다
      • 1948년부터 1960년까지 이승만 정부의 국가 총예산의 평균 10.5%는 교육 관련 지출이었다.
      • 국민학교(초등학교) 의무교육제가 채택되었으며 빈민층일수록 학구열은 더욱 높았다.
      • 교육을 통해 그 누구라도 신분이 상승할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 1공 화국의 최우선 목표 중 하나가 문맹을 퇴치하고 교육제도를 개선하며 학생 엘리트를 양성한다는 것이었다.
      • 한국 정부가 미국의 원조금으로 미국 내 한국인 유학생들의 학비를 지원했다
      • 이승만은 국방비 다음으로 늘 교육비에 많이 투자해 1945년 대비 대학생이 12배나 증가해 동시기 영국보다 대학입학률이 높았다.
      • 일반 상식과 민주주의에 대한 고등교육을 받은 이들은 이승만의 독재를 지켜보진 않았다.
      • 이승만은 자신을 타도하는 자산 (대학생)을 적극적으로 키운 셈이다
    • 도시화와 매스 미디어의 보급
      • 6.25 전쟁 이후 수많은 탈북민들이 남한에 정착하고 인구 구조가 새롭게 재편되면서 급격한 인구 성장을 보였다.
      • 교육받고 계몽되고 깨어 있는 국민들이 도시를 중심으로 집중되면서 일종의 상승 효과가 나타났다
      • 밤을 새워가며 시국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하고 개탄하였다.
      • 1960년 기준으로 전국에 있는 대학생들 두 명 중 한 명은 서울에 사는 대학생이었다.
    • 청년 실업 문제
      • 대학을 졸업한 훌륭한 인재들이 일할 만한 일자리가 없었다
      • 한국의 경제는 대단히 낙후되었기에 실업률 자체가 높은 건 어쩔 수 없었으나 고등 교육을 받은 대학생조차 일하기 힘들다는 점은 심각한 문제였다.
      • 대학은 예비 실업자 양성소인가라는 자조적인 조롱이 유행하기도 했다
      • 실업률은 2명에 1명 꼴인 50%에 달했고 미래에 대한 비전을 찾을 수가 없었던 분위기였다.
      • 미국도 점차 경제 원조를 삭감하고 있던 추세였다.
      • 사회 전반, 전 세대에서 이승만 정부에 대한 지지를 조금씩 철회하던 중이었다.
    • 정권유지 능력 퇴보
      • 이승만 대통령은 실세 2인자의 출현을 막고 정권의 핵심인물들 간에 균형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심복이나 측근을 신뢰하지 않았다
      • 나이가 80대에 접어들자 판단력이 흐려져 자유당의 고위인사들을 무조건 신임하게 된다
      • 대통령 경호를 책임지는 곽영주 경무관은 “부부통령”이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대통령의 신임을 마패로 삼아 각종 권력형 범죄를 저질러 물의를 일으킴
      • 언론과 지식인, 대학생의 반정부 성향이 강해지던 싯점이라 4.19 혁명으로 이어지는 기폭제가 되었다.

4.19혁명은 국민들의 민주주의 의식 고취는 거의 필연에 가까운 일이었다. 어릴때 부터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귀딱지 생길정도로 주구장창 들었던 세대인 나도 민주주의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그 민주주의를 수호하는것이 나라사랑의 지름길이라 생각했다

당시를 배경으로 삼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영화판을 보면 도덕시간 때마다 학생들이 주야장천 읽는 대목이 다 민주주의 관련이다. 그리고 교육에 대한 열망과 교육열, 교육수준도 높은 국민으로 성장하다 보니 정부에 대한 언론의 비판 활발하게 진행됐던 시기이기도 했었던것 같다

의식있는 언론인들이 쓴 쓴 사설과 기사들을 독자들이 무리 없이 읽을 수 있었고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신문을 구독 했었다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 전국 팔도 각 도시마다 집중되었으니 조직적 시위를 도모했던것 같다


4.19 혁명은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촉발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고 이러한 분위기는 이승만 이승만 정권 스스로 만든 셈이이다. 이승만 정권이 말한 ‘민주주의’는 지극히 정권편의적인 냉전기 반공주의적 문맥에서만 국한한 ‘민주주의’ 였지만 신생 대한민국 국민들이 공부하고 종교처럼 믿고 추구하기 시작한 민주주의는 진정한 의미에서 국민주권과 정치적 자유에 기반한 그 민주주의였던 것이다. 그러한 것에 촉발된 것이 4.19 혁명이 었다

4.19혁명https://namu.wiki/w/4.19%20%ED%98%81%EB%AA%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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