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로왕릉, 김해여행 철기문화의 성지 김해, 사적 73호, 입장료도 무료입니다

김수로왕릉, 가까운 지척 김해에 있는 유적지 인데 사실 크게 관심도 없었고 가보지도 않았습니다. 뭐 특별할게 있냐 싶기도 하고 고분이나, 왕릉은 경주가 최고이기에 . . . 그런데 가야시대 그리고 김해 김씨의 시초라는 김수로왕릉이 1시간내 거리에 있는데도 한번 가보지 않았다는데 대해 다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이번 김해 목련꽃 군락지 보러 이동하면서 방문하게 됐습니다.

김수로왕릉을 보고난 심정은 ” 뭉클 ” 이었습니다. 신라시대의 대표적 도시 경주보다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소박한 왕릉을 보는 순간 아 ~ 편안하다, 그리고 약간의 감동까지. 다양한 시설물과 볼 거리가 많은건 아니지만 유유자적 거닐면서 가볍게 산보한다는 생각으로 쉬고 왔습니다. 친구가 싸간 김밥도 그늘에서 먹으며 하늘이 참 맑은 하루 였습니다

김수로왕릉

  1. 가야국의 창립자인 전설적인 김수로왕의 왕릉임
  2. 고대 한국의 정신과 문화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생생한 역사의 현장
  3. 김수로왕릉은 고분 형태로 조성되어 있으며 한국 고대 무덤건축의 전형적인 모양입니다
  4. 주변의 자연 경관과 어루러진 능은 고요하고 평화롭다
  5. 김수로왕릉은 연중 무휴 개방이고
  6. 입장료는 무료임
  7. 동절기인 2월까지는 9시 부터 오후 시까지 개방하고 있다
  8. 홍살문은 전통적으로 동아시아 문화권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신성한 공간이나 중요한 장소의 입구에 있는 상징적 구조이
  9. 경의와 존중을 표하는 공간임을 나타낸다
  10. 봄에는 벚꽃이, 가을에는 단풍이 장관을 이룬다
  11. 가야는 철기문화와 새상 무역의 중심지였으며 김수로왕은 문화와 경제의 번영을 이끈 주역이다
  12. 승정전은 김수로왕과 그의 왕비인 허황옥의 신위를 모신곳이다

.

김수로왕릉 개요

  1. 김수로왕릉은 사적 제73호.
  2. 경상남도 김해시 가락로93번길 26 (서상동)에 있는 무덤이다.
  3. 김수로왕은 전설에 따르면 가락국의 초대 국왕이자 김해 김씨의 시조이다.
  4. 원형 봉토무덤으로 높이가 5m며 주위 18,000여 평이 왕릉공원으로 지정되었다.
  5. 도보 20분 내 거리에 수로왕비릉, 국립김해박물관, 김해여객터미널 등이 있다.
  6. 예부터 납릉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다.
  7. 김수로왕릉 구역 안에는 수로왕의 위패를 모신, 팔전 중 하나인 숭선전(崇善殿)과 안향각·전사청·제기고·납릉정문·숭재·동재·서재·신도비각·홍살문·숭화문 등 건물들과 신도비·문무인석·마양호석·공적비 등의 석조물들이 있다.
  8. 가야 때 수로왕 사후에 지은 빈궁(殯宮),
  9. 라 문무왕 때 지은 사당이 있었으나 수백 년이 지나 조선시대 들어서는 옛 시설들이 많이 사라졌지만, 왕릉의 격에 맞추어 여러 시설들을 추가하여 지금까지 전한다.

김해 목련꽃 군락지https://powershin.co.kr/%eb%aa%a9%eb%a0%a8-%eb%b6%80%ec%82%b0%ec%9d%b8%ea%b7%bc-%ea%b9%80%ed%95%b4-%ed%9d%a5%eb%8f%99-%eb%aa%a9%eb%a0%a8-%ea%b5%b0%eb%9d%bd%ec%a7%80-%ea%b9%80%ed%95%b4%ec%8b%9c-%ed%9d%a5%eb%8f%99-333-8/

김수로왕릉 특징

  1. 수로왕 이야기는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 전하지만, 무덤이 정확히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2. 김수로왕릉무덤이 수로왕이 묻힌 곳이 아니라는 설도 있으나, 많은 학자들은 적어도 본 무덤이 삼국유사에 수로왕릉이라고 기록된 그 무덤임은 확실하다고 본다.
  3. 금관가야 멸망 이후에도 신라 문무왕의 명령으로 매년 제사를 지냈다.
  4.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의하면 후삼국시대의 혼란기에도 호족 소충자가 수로왕의 사당을 빼앗으려고 시도하기도 했지만 간신히 넘겼다.
  5. 고려 문종대까지는 비교적 능의 보존상태가 좋았다는 기록이 있지만, 조선 초기에는 많이 황폐해진 듯하다.
  6. 세종실록에 수로왕릉과 수로왕비릉을 중심으로 사방 30보에 보호구역을 표시하는 돌을 세우고, 다시 세종 28년(1446)에는 사방 100보에 표석을 세워 보호구역을 넓혔다는 기록이 있다.
  7. 선조 13년(1580) 수로왕의 후손인 허수가 수로왕비릉과 더불어 크게 정비하여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8. 무덤을 열어보는 것은 불경한 일이므로 현대에 발굴한 적은 없지만 『지봉유설(芝峰類洩)』 기록에 따르면, 수로왕릉이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게 도굴을 당하여 내부가 드러났는데, 순장된 여자 시신 두 구가 있었다고 한다.
  9. 수로왕릉은 큰 돌방무덤(석실묘)일 것이다.

김수로왕릉 전설

  1. 김수로왕릉은 투탕카멘의 저주와 유사하게, 삼국유사 수로왕편에 따르면 수로왕릉을 함부로 건드린 사람들이 온갖 횡액을 당했다고 한다.
  2. 신라 말년 후삼국시대에 호족 충지의 부하 아간 영규라는 사람이 멋대로 수로왕릉에 제사를 지낼 권한을 빼앗고 단오날 제사를 올리다가, 사당의 대들보가 까닭없이 무너지는 바람에 깔려 죽었다.
  3. 영규의 상관이던 충지가 수로왕의 영정을 그려놓고 경건히 제사를 지냈는데, 사흘도 채 못 되어 영정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려 땅바닥에 거의 한 말이나 흥건히 괴었다. 충지는 두려워 영정을 불태우고 수로왕의 후손들에게 다시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4. 몇 년이 지나 단오날 제사에 영규의 아들 준필이 행패를 부리며 후손들이 차려놓은 제수를 치워놓고 자기가 멋대로 제수를 차려서 제사를 지내다가 술잔을 다 올리기도 전 갑자기 병이 나서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죽었다고 한다.
  5. 사당 내부에는 금옥이 많았다고 한다. 이를 노리고 들어온 도적들이 있었는데, 처음 시도에서는 웬 중무장한 갑옷무사가 사당 속에서 나타나 도적 일고여덟 명을 활로 쏘아 맞히자 도적들이 달아났다. 며칠 후 그들이 다시 왔을 때에는 길이가 30여 척이나 되는 거대한 구렁이가 사당 옆에서 나와 도적 여덟아홉 명을 물어 죽이자 도적들은 두려워하여 도망가 버렸다.
  6. 고려 성종 11년(992)에는 김해부의 양전사 조문선이란 사람이 수로왕릉에 딸린 밭이 너무 많으므로 줄이자고 요청하여, 조정에서 반려 끝에 절반을 김해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일이 끝나갈 무렵 조문선의 꿈속에 귀신 일고여덟 위가 나타났다. 귀신들은 조문선에게 큰 죄를 지었으므로 잡아 죽이겠다고 하며 칼과 밧줄로 고문을 가했다. 조문선은 꿈에서 깨어났으나 이내 병이 걸리는 바람에 남에게 알리지도 못하고 밤중에 급히 도망, 관문을 지나다가 이내 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김수로왕릉https://namu.wiki/w/%EC%88%98%EB%A1%9C%EC%99%95%EB%A6%89

댓글 달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Scroll to Top